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남양 군도 (문단 편집) == 인구 == 남양 군도는 1939년 12월 말 기준으로 인구가 총 12만 9104명이었는데, 원주민의 숫자는 5만 1723명, [[일본인]][* 민족적 의미의 일본인뿐만 아니라 식민지의 주 민족인 [[조선인]]과 [[대만인]]을 포함한다.]의 숫자는 7만 7257명으로 일본인의 숫자가 더 많았다. 이는 남양 군도가 일본의 위임통치령이 된 이후 일본인의 지속적인 이주, 정착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. 이주 일본인 대부분은 [[오키나와]] 출신이었으나 당시 경제적으로 낙후되었던 [[도호쿠]]나 [[홋카이도]] 출신들도 많았다. 특히 [[사이판]]에선 인구의 90%가량이 일본인이었을 정도였다. 1930년대부터 일본인의 수가 원주민 수를 능가했고, 특히 중심도시인 [[코로르]]나 [[사이판]] 등은 일본인이 원주민보다 훨씬 많아서 [[일본어]]가 주로 쓰였고, 원주민들도 학교에서 일본어를 필수적으로 배우기도 했고 좋은 직장을 얻는데 능숙한 일본어 구사 능력이 필수적이었다. 또 [[오키나와]] 출신이 많아서 [[오키나와어]]도 쓰였다. [[팔라우어]]를 비롯한 원주민들의 언어는 학교에서의 사용은 금지됐지만 일상생활에서 사용까지 막은 건 아니어서 원주민들의 일상 생활에선 여전히 쓰였다. 또 얍이나 마셜 제도와 같이 일본과 거리가 멀었던 섬에선 일본인들의 수도 적어서 일본어가 잘 쓰이지 않고 여전히 원주민들은 자신들의 언어를 주로 사용했다. 그 외에 한 때 [[스페인]]과 [[독일]]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극소수(124명)의 백인들도 있기는 했다. 원주민들은 당시 대만인, 조선인과 다르게 일본 국적이 부여되지는 않았고 식민지 조선이나 대만이 그랬듯 원주민들은 불평등한 노동 조건과 임금을 받으며 일을 했다. 원주민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었는데 첫째는 차모로인, 둘째는 차모로인을 제외한 나머지인 카나키인이었다. 차모로인은 [[스페인어]] 어휘를 일부 구사하고 생활 수준도 더 높아서 카나키인보다 우대받았다. 일본인들은 패전 이후 미군에 의해 일본으로 송환되었다. 지역에 오랫동안 살아 온 일본인은 송환을 거부하고 정착을 허락해주길 희망했지만, 일본 통치 이전부터 지역에서 살아 왔거나 일본인 호적에 등록되지 않은 혼혈 등을 제외하면 예외없이 귀국당했다. 하지만 이 때 남은 일본계 혼혈이 여전히 지역의 주요 민족으로 남았다. 예를 들어 지금도 [[팔라우]]에는 사토, 타나카와 같은 일본계 성씨를 쓰는 주민들이 여전히 많고 [[미크로네시아 연방]]에서도 일본계 대통령이 둘이나 배출된 바가 있다. 보통 지역 인구의 20% 가량이 일본계 혈통이 포함되어 있다고 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